화양연화


2018/04/09 04:47

제주의 다짐 [S]

처음 진짜 제주를 갔을때가 아마 29살 혹은 서른쯤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한참 제주의 올레길이 막 유행처럼 시작될때였고
제주에 갈때마다 하루 한코스의 올레길을 걸으며 제주를 느꼈다
그리고 제주는 역시 바다라고 생각하며
늘 어느 바다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동쪽의 협재, 서쪽의 월정리도 좋았지만
관광객들로 북쩍이는 그곳보다는
평대리나 세화 해변, 혹은 저 멀리 대평리 해변이 좋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나는 바다보다 제주의 숲이 좋아졌다
몇해전부터는 그래서 제주에 가면
하나의 오름을 오르곤 했었다
제주의 수 많은 오름이 있지만
새별오름이나 다랑쉬 오름같은 유명한 오름을 제외하고는
제주의 오름을 오르는 이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제주의 오름은 늘 좋았고
제주의 오름은 늘 외로웠다

나는 너와 꼭 오름에 오르고 싶었다

그것이 어떤 오름이던지 간에
나는 꼭 너와 그 숲길을 걸어 오름에 오르고 싶었다

너와 손을 잡고 숲길을 걸어 오름에 오르던 그 순간,
도란도란 별것도 아닌 이야기들을 하며
숲 속, 우리 둘만 있는 것처럼 웃으며
가파른 오름을 올라가는 그 시간이
나는 너무 행복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
내가 너를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
너와의 대화는 언제나 너무 재미있다
너랑 노는 일이, 너와 이야기하는 일이
나는 세상에서 제일 좋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것일까
아이가 없었다면
여전히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을 거란 너의 이야기에,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아이 없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싶다는 너의 이야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가라앉고 말았다
제주의 바람이, 그 오름에서 내려다본 제주의 해질녁 풍경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시간이 더 흘러,
아이가 더 이상 부모의 보호가 필요없어지는 나이가 된다면
그때가 되면 어쩌면 너는 다시 그때의 너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저, 지금의 현실을 조금 내려놓기 위한
그저 작은 휴게소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장거리 여행을 위해 꼭 필요한 곳이지만
절대 누구도 머무르지 않는, 고속도로의 휴게소 같은...

하지만 쓸데없는 감상으로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런 나만의 생각으로 후회로 가득찬 여행을 한 일들을
나는 겪어봤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잠시 머무르다 가면 또 그게 뭐 어때서...
세상에 영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듯이
우리 또한 영원히 함께할 수는 없을테니..
그저 지금, 우리가 함께하고 있는 시간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제주의 바람은 점점 더 거세졌고
오름에서 내려와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
그림같은 석양이 눈앞에 펼쳐졌고
서둘러 차를 세워 일몰을 지켜보았다
눈깜짝 할 사이에 해는 사라졌지만
해가 흩뿌려놓은 그의 흔적은 꽤 긴 시간 하늘에 남겨졌다
언젠가, 너와 내가 이별을 한다고 해도
서서히 검게 물들어간 저 하늘처럼
우리의 존재도 꽤 긴시간
우리의 마음 속에 남아있을거라는걸 알았다

우리의 사랑은 잘못되었고
어쩌면 더 큰 시련을 맞이해야할지도 모른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시작하지 말았어야할 사랑이고
한순간 감정에 휩쓸려 시작된 사랑이라고 해도
이내 관두어야했을 사랑이라는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여전히 너의 손을 잡고 있는 이유는
나는 도저히
너보다 더 나은 사랑을 만날 자신이 없다
나는 너보다 더 좋은 사람을, 더 재밌는 사람을, 더 이쁜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제주의 바다가 검은빛으로 물들어갈때쯤
나는 더욱 더 최선을 다해 너의 손을 잡기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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